3주 동안 주말 제외 하루 4시간씩 훈련하기로 한 처음 계획은 절반 정도만 달성되었다. 그래도 Anki에 자료를 입력한 시간까지 합하면 보름 넘게 하루 평균 3시간씩은 투자했으니, 최근 2년 간 훈련을 1도 않고 참가한 다른 대회에 비하면 맹훈련(?)을 한 셈이다. 다만, 훈련 시간의 70% 가량을 카드와 숫자의 자료입력과 변환(정형화) 훈련에만 투자해서 각 종목에서의 결합훈련과 전략수립을 거의 못한 점이 살짝 불안했다.
대회 이틀 전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시한 숫자와 카드 모의 실전훈련에서 5분 숫자 214, 15분 숫자 440, 10분 카드 5팩 반을 찍었으니 이 정도면 4000점은 쉽게 넘고 4500점 이상도 가능하리라...(그러나 세상이 어찌 내 뜻대로만 되랴^^;)
2월 17일 전야제
2월 17일 금요일의 스케줄은 1시~3시까지 세미나 특강, 4시~7시까지 전야제.
6시에 출발해서 전야제 끝날 즈음에 합류하려 했는데, 원래 스케줄보다 훨씬 일찍 끝나는 바람에 작업실에 눌러 앉아 운영전략을 짜는 데 몰두했다.
아래 첫 번째 사진은 참가 외국인 선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 왔고, 그 이 후의 사진들은 동호회 회원들이 단체 카톡방에 올린 것들이다.
인천공항 전광판에 뜬 환영인사. 외국 선수들의 페북을 보니 대부분 이 장면에서 상당히 신선한 감동을 받은 것 같다. 공항 전광판을 통해 이런 환영인사를 받아본 적은 처음일 것이다.
오리쌤과 함께 한국 유이의 국제기억력마스터이자 한국기억력스포츠협회 이사인 계원. 이 대회의 조직위원장으로 1부 세미나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오리쌤의 절친 넬슨 델러스의 2부 세미나 특강. 넬슨은 총 4회 미국 챔피언이고 에베레스트와 K2를 오른 등반가이기도 하다.
세미나가 끝나고 4시부터 시작된 전야제. 중앙대 풍물패의 공연.
중앙대(?) 댄스 동아리의 공연. 세계대회가 아닌 일반 국제대회에서 벌어진 전야제는 이번 한국대회가 처음일 것이다. 나름 성의를 다해 준비한 흔적이 역력하다.
각국 선수들과 가족들, 일부 한국 참가선수들이 전야제를 관람하고 있다.
선수 ID카드 뒷 면에는 17~19일의 스케줄이 인쇄되어 있다. 주최측의 세심한 배려.
각국 기수단 등장. 무려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대회가 아닌 일반 국제대회에 이렇게 많은 국가가 참가한 경우는...아마도 이번 한국대회가 처음인 듯 하다.
전야제가 끝난 후 한국기억력스포츠 동호회 단톡방 회원들끼리 찰칵! 눈동자들이 아~~주 똘망똘망하다. ㅎㅎ
후세에 길이 빛날...한국기억력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도원결..아니 국밥집 결의!
뜨거운 국밥 한 그릇에 다 같이 새끼 손가락을 집어 넣고 5분간 우려낸 후 그 국물을 나눠 마시면서 한국 기억력스포츠의 발전을 결의했다고 한다.(^^;;)
2월 18일 대회 첫째 날
택시를 타고 중앙대 체육관으로! 불과 15분 거리다. 매번 국제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오가는 문제, 언어 문제, 먹는 문제, 자는 문제때문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는데...ㅎㅎ
도착하니 9시가 좀 안 되었다. 체육관 문을 들어서니 바로 오른 쪽 앞에 등록 테이블이 보인다. 계원이 그 앞에서 담당자들에게 등록받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깐 기다렸다가 제 1착으로 등록 완료.
등록 테이블 앞에 참가자들이 몰려 있다. 몹시 추운데도 넬슨은 반팔차림이다 ㅎ
등록을 마치고 좌석 배치표를 보니...헉! 전 세계챔피언이자 현 세계랭킹 1위(IAM 랭킹은 2위)인 요하네스 말로우와 같은 테이블이다. 오른 쪽은 세계랭킹 4위 사이먼 라인하르트, 바로 뒷 테이블에는 총 4회 미국챔피언인 넬슨 델러스다. 한 테이블의 왼쪽은 외국인 선수들이 세계 랭킹 순서대로, 오른 쪽은 한국 선수들이 한국 랭킹 순서대로 배치되었다. 이런 좌석 배치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한국 랭킹 1위로서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공간은 심리에, 심리는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 학습기억법 교재와 영상 제작에 집중하느라(^^;;) 늘 대회기억법(기억력스포츠)에는 시간 투자를 거의 못 했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숫자와 카드의 정형화에만 20시간 가까이 투자했으니 최소한 4000점은 기본이고 4500점 이상도 충분할 것이다. 제 실력만 발휘하자.
cf. 한국기억력대회가 열리기까지... 기억법 또는 니마닉스mnemonics는 기원 전 500년 경 고대 그리스에서 텍스트를 확실히 이해하고 기억하고 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기억법mnemonic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시모니데스Simonides와 로마의 키케로Cicero다. 그 이후 중세와 근대로 들어서며 적지않은 저명한 학자와 연구자들이 기억법을 습득했다. 하지만 그 방법론과 체계를 누구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1990년대에는 토니 부잔Tony Buzan이라는 걸물이 기억력스포츠란 것을 만들었다. 토니 부잔 역시 진짜 공부하는 데 있어서 기억법의 방법론과 체계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토니 부잔이 만든 기억력스포츠에서는 주로 숫자와 카드를 잘 외워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데, 실제 학습상황에서는 카드와 숫자를 외워야 할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맹점이다. 토니 부잔 류의 기억법을 무시하고 시모니데스처럼 실제 학습에 도움이 되는 기억법을 연구해 온지 30년이 넘었다. 2010년 즈음해서 중국 스폰서의 뒷받침으로 토니 부잔의 기억력 대회가 탄력을 받았다. 실제 학습에 도움이 되는 학습기억법을 전공하는 입장이지만, 혹시라도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서 대회기억법을 경험하고 싶었다. 2013년 12월 한국인 최초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세계 기억력 대회에 출전했다. 단순히 기억력스포츠(대회기억법)가 아닌 진짜 기억법인 학습기억법 전문가로서 한국 기억력스포츠의 기초를 만들고 싶었다(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학습기억법 또는 기억력스포츠의 매니아들과 함께 <비법인 한국기억력스포츠 협회>란 이름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2016년에 애로우 잉글리쉬 최재봉 원장이 <사단법인 한국기억력스포츠협회>를 설립했다. 비공식에서 공식으로 아마츄어에서 프로로 가는 한국 기억력스포츠의 전환점이다. 이에 따라 <비법인 한국 기억력스포츠협회>는 <한국 기억력스포츠 동호회>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드디어 2017년 2월 <사단법인 한국 기억력스포츠 협회> 주관으로 제 1회 한국 국제 기억력 선수권 대회가 개최된 것이다. |
테이블 세팅이 모두 끝나고 일찍 도착해 등록을 끝낸 선수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있다.
오리쌤을 포위한 요하네스, 사이먼, 넬슨. 이 3인의 선수들과는 1년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가볍게 인사하고 10진수와 2진수용 OHP 필름에 선을 긋는 중에 찰칵!
대회 첫 날 토요일은 마침 유별난 한파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다. 중앙대 체육관은 2층에서 초대형 헤어드라이어기같은 송풍기로 따뜻한 바람을 쏘아내는 방식으로 난방을 했다. 하지만 바람이 세고 소음이 심해서 극도의 집중이 필요한 기억력스포츠 대회에서는 휴식시간에만 잠시 가동되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주최 측에서 옷을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사전 고지를 해 준 덕에 옷가지를 하나 더 가지고 갔지만...그보다는 두터운 잠바를 입고 갔어야 했다. 위에 조끼를 하나 걸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추위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군에서 철조망 근무한 이래 이렇게 하루 종일 떨어본 적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요하네스 말로우는 이 추위를 버티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 벽쪽에 작은 히터가 하나 있어서 조금이라도 추위를 덜어주기 위해, 테이블 자체를 히터 쪽으로 옮겼다. 그래서 나온 그림이 아래 사진이다^^;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섬 하나...이 외로운 섬에서 요하네스와 (물론 요하네스는 그렇게 생각 않겠지만) 혈투(?)를 벌였다 ㅎㅎ 위치가 이렇다 보니 자원봉사자, 아비터, 대회 관계자 등이 앞뒤로 좌우로 지나쳐 가는 경우가 많았다. 맨 앞 줄에서 대회를 치른 경험이 없는 오리쌤으로서는 (게다가 이런 예외적인 상황에서 ㅎㅎ) memo sheet에만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경기는 시작된다. 이제 드디어 제 1회 한국 국제 기억력대회 첫 번째 종목이다. 5분 동안 얼굴이름을 최대한 많이 외워야 하는 <5분 Names & Faces>
1. 5분 Names & Faces
- 얼굴이름을 5분간 최대한 외우고 15분간 recall한다. 하나의 얼굴 사진 아래에 성(second name)과 이름(first name)이 제시되며 각각 하나의 이름으로 독립적으로 채점된다.
대회 전에 훈련하면서 가장 흔한 외국인 이름 1000개를 정형화해 놓았다. 대회기억법 훈련사이트인 메모리 리그에서 얼굴이름 종목을 틈틈이 훈련하여 레벨 9에 올라 있다. 레벨 9는 1분에 15 names를 외워야 한다. 1분에 18 names를 외우면 최고 수준인 레벨 10이 된다. 18개 이상을 외운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외국인 이름이라 철자를 몇 개씩 틀리는 바람에 레벨 10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렇게 흔한 이름 1000개를 정형화하고 메모리 리그에서도 거의 최고 레벨이기 때문에, 이 종목에서는 개인 최고기록 경신을 예상했다. 5분 동안에 최소한 30 names는 기억하지 않을까?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대회 바로 전날에 필승전략을 수립했다.
1) 전반 2분 30초 동안, 한 글자 또는 두 글자 이름을 최대한 많이 외운다.
2) 후반 2분 30초 동안 1)을 반복하면서 다른 first 또는 second name을 외운다. 긴 이름일 때는 패스하고 더 짧은 이름을 찾는다.
3) first인지 second인지 모를 때에는 두 곳에 다 같은 이름을 써낸다.
그러나...결과적으로 필승전략이 아닌 필패전략이 되고 말았다. 이 전략에 따라서 실전훈련을 두 세번만이라도 해 보았다면 30 names를 충분히 기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실제 대회에서 이 전략을 처음 써보자니...짧은 이름 찾기 위해 이리 저리 헤매느라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시간은 시간대로 다 보내고 말았다.
결국...얼굴이름 종목은 역대 참가 대회 중 훈련량이 가장 많았음에도 기록은 역대 최저인 21 names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이런...
2. 5분 2진수
- 5분 동안에 2진수를 최대한 외우고 15분간 recall한다. 1줄row은 30자리의 이진수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줄의 30자리를 다 맞히면 30점, 한 자리를 틀리면 절반인 15점을 주고, 두 자리 이상 틀리면 0점 처리된다.
이 종목에서는 시스템상 500점 이상의 고득점이 가능함에도 최근 2~3년간 늘~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를 얻곤 했다. 0과 1로만 인쇄된 memo sheet를 보면 눈이 아파서 짜증이 났다. 이번에는 5분짜리니까 꾹 참고 500점 이상의 고득점을 해 보자고 다짐했다.
원래 계획은 20줄까지 1회만 결합해서 500점 이상을 얻는 것이었지만, 10줄을 처리해 보니 머리에 선명하게 박히지 않은 것들이 몇 개 있었다. 그 다음 10줄을 나가는 것보다, 앞의 10줄을 1회 더 반복하고 그 다음 줄을 외워 나가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두 15줄을 외웠고 그 중 이미지 하나를 인출해 내지 못해서 총 14줄만 기억한 결과가 되었다. 420자리만 성공, 420점 획득.
(5분 이진수에서는 calculation factor가 1이기 때문에 기억한 이진수의 숫자와 획득한 점수가 똑같다)
500점을 못 넘어 아쉽기는 했지만 기억력스포츠는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나름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
3. 5분 구체적 이미지 Concrete Images
- 한 페이지는 10줄, 각 줄에는 5개의 구체적 이미지가 배열되어 있다. 각 줄의 구체적 이미지 순서를 5분간 최대한 많이 외우고 15분간 recall한다. 한 줄의 순서를 모두 맞히면 3.12점을 주고, 틀리면 1점 감점된다.
이 종목부터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전 세계챔피언(WMSC 세계 랭킹 1위, IAM 세계랭킹 2위) 요하네스 말로우Johannes Mallow에게 말리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 10줄 중에서 5줄도 못 외웠는데 바로 옆에서 페이지를 휙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몇 초간 허둥대다 다시 속도를 내보았지만 첫 페이지 마지막 줄에 도달하기도 전에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로 계속 허둥지둥...모두 3페이지 반을 외웠지만...인출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결과는 121포인트 획득에 그치고...
구체적 이미지는 실전 모의 훈련을 두 세번 거치면 누구든 이미지 150개 이상을 외울 수 있는 종목이다. 처음 채택되는 종목이기 때문에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대회 전에 아래 세 가지 방식의 효율성을 한 번씩 실험해 보았다.
1. 대회 2주 전 기억력스포츠 동호인들과 함께 한 전 종목 실전모의훈련에서는 한 장소(기반)에 두 개의 이미지를 결합해 보았다.
2. 대회 며칠 전, 전반 2분 30초 동안 기반을 사용하지 않고 4개의 이미지를 연쇄결합해 보았다. 두 페이지 넘는 23줄을 외웠고 인출 성공률은 90% 이상이었다.
3. 나머지 후반 2분 30초 동안 하나의 장소에 한 개의 이미지씩 결합해 보았다. 위 2번보다 효율이 크게 떨어짐을 실감해서 중간에 그만 두고...최종적으로 2번 기반을 사용하지 않고 4개 이미지로 연쇄결합(이야기 만들기)하기로 결정했다.
5분간 4페이지(200개) 정도는 충분히 외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요하네스의 페이스에 스스로 스텝이 꼬여 넘어지면서 거의 최악의 점수를 기록했다. 기억력스포츠에서 요하네스와 나는 랭킹 차이가 워낙 나기 때문에 서로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다. 경쟁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학습기억법에서 요하네스가 오리쌤의 라이벌이 아닌 것처럼 대회기억법에서 오리쌤은 요하네스의 라이벌이 아니다. 좀 더 편하게 시합할 수 있었는 데 왜 자꾸 부담이 되고 신경이 쓰일까? 한국 랭킹 1위로서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때문이었을까? 어쨌든...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10위 밖으로 밀려난 점수였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cf. 구체적 이미지 종목은 이번 한국대회에서 WMSC의 추상적 이미지 종목을 대신해서 기억력스포츠 역사상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추상적> 이미지가 <구체적> 이미지로 바뀌었을 뿐이고 경기 방식은 추상적 이미지와 같다. 다만 한 줄 당 배점을 얼마로 하느냐가 문제였는데, 한국 대회 최초의 경기 후 선수들의 성적을 감안하여 한 줄 당 3.12점으로 결정되었다. cf. 그런데 이 종목이 끝난 후 요하네스 말로우에게 물어보니 그는 위 1번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요하네스 말로우가 2번 방식을 사용하면 기록이 향상될까? |
원래 스케줄은 5분 숫자 첫 회를 마친 다음에 점심식사 시간인데, 대회장 세팅 등으로 인해 몇 십분 지연되어서 구체적 이미지 종목 후에 바로 점심식사 시간을 주었다. 기억력스포츠 동호회원들은 밖으로 나가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오리쌤은 주최 측이 준비한 따뜻한 강의실로 들어가 간단히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식사 후 오후 첫 종목은 5분 숫자.
4. 5분 숫자
- 5분 동안 숫자를 최대한 많이 외우고 15분간 recall한다. 한 페이지에는 25줄이 있고, 각 줄에는 40자리의 숫자가 나열되어 있다. 40자리를 모두 맞히면 40포인트, 한 자리를 틀리면 절반인 20포인트, 두 자리 이상을 틀리면 0점 처리된다.
구체적 이미지에서 스텝이 꼬였다. 이어진 5분 숫자 종목에서도 그 꼬인 스텝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부진이 계속되었다. 대회 전전날 최종 점검에서는 5분 200자리를 쉽게 넘었고, 240자리 달성을 목표로 하면서 시스템을 일부 수정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에서는 120자리, 두 번째 시도에서는 160자리만 기억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카드와 숫자는 나름 맹(?)훈련을 했는데 왜 기록은 거꾸로 갈까? 결합훈련에 소홀한 이유도 있지만...기억력스포츠는 정말 심리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한다.
cf. 요하네스 말로우는 기억력스포츠 26년 역사상 5분 동안 500자리 이상을 외운 4인 중 1인이다. 중국의 숫자 괴물 왕펑 Wang Feng이 2011년 중국 세계대회에서 500자리 신기록을 세웠고 그 몇 년 후에 요하네스 말로우 JohannesMallow가 504자리를 외웠다. 그리고 재작년 중국 세계대회에서 절대양강 알렉스 멀렌 Alex Mullen과 마윈 왈로니우스 Marwin Wallonius가 520자리를 외웠다. |
절해고도(?)에서 세계 최고수 요하네스 말로우와 세기의 대결(^^;;)을 펼치고 있는 오리쌤. 하네스(요하네스 말로우의 애칭)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있는데...오리쌤 혼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30년 넘게 메타학습법을 공부해 왔다. 메타학습법의 한 부분인 학습기억법에서는 나름 성취한 바가 있어서 <현대 기억법의 대가Grand Master>라고 인정해 주는 분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대회기억법(기억력스포츠) 분야에서는 그저 3000점대 국제기억력마스터일 뿐이다. 진짜 기억법인 학습기억법의 전문가라도 카드와 숫자 등을 외우는 기억력 대회에 참가하여 한참 어린 요하네스, 사이먼, 넬슨 등과 경쟁하는 일은...쉽지 않다.
But... 세계 최고수 옆에서 숨가빴던 선수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오리쌤의 뒤를 이어 한국 랭킹 2위에 올라 있는 주상(조감독)은 이번 대회에서 거의 전 종목에 걸쳐 개인 최저 점수를 얻어 national(한국인)부문에서도 4위에 그쳤다. 40대 중반을 넘는 나이 탓도 있었을테지만...아마도 세계 최고수 중 1인인 사이먼 라인하르트 옆자리라서 고생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ㅎㅎ
얼핏 보기에는 큰 부담 없어 보이는 혜정(고쌤). 하지만 바로 옆의 몽골 스무살 무흐슈르(Munkhshur)는 작년 19세때 단 5개월 훈련만으로 세계대회 국제기억력그랜드마스터(IGM)의 반열에 올랐고, 20세때인 이번 대회에서는 사이먼 라인하르트, 청 아이창, 판 저치, 넬슨 델러스 등 세계적 강자를 꺾고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기억력스포츠계의 천재 소녀다.
앞으로의 세계 기억력스포츠계는 20대 초중반의 알렉스와 마윈 그리고 20살의 무흐슈르와 익흐슈르 두 쌍둥이 자매를 포함한 몽골 청소년 간의 핑퐁게임이 되지 않을까? 그 가운데서 이제 30대 중반을 넘긴 요하네스 말로우와 사이먼 라인하르트가 최후까지 버텨 보는 구도가 몇 년간 유지될 듯하다.
5. 5분 역사 연도
5분간 역사 연도를 최대한 많이 외운다. 15분간 순서를 뒤섞은 사건들을 보고 해당역사 연도를 써 넣는다.
요하네스 말로우는 2011년 스웨덴 오픈에서 5분간 132개 연도를 외워 세계기록을 세웠다. 최근 5년간 요하네스 말로우와 사이먼 라인하르트 세대의 거의 모든 기록들을 놀라운 속도로 갈아 치우고 있는 알렉스 멀렌, 마윈 왈로니우스, 랜스 치어하트 등 기억력스포츠계의 초신성들도 이 기록에는 아직 범접조차 못하고 있다.
역대 1위인 요하네스의 132개 기록 아래에 2위 랜스 치어하트, 공동 3위 알렉스 멀렌과 마윈 왈로니우스의 기록은 각각 111개, 110개이다. 독보적 1위 아래에 20여개 차이의 2위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
요하네스 말로우에게 역사 연도 세계기록 보유자란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하니,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세계기록이라고 하며 알렉스 멀렌이 스피드 카드를 16초대에 외웠다고 기막혀 한다. 흠...내 보기엔 알렉스나 하네스나 기막히긴 마찬가지다. 학습기억법이 아닌 대회기억법에서는 둘 다 참 놀라운 존재들이다. 한국기록이기도 한 오리쌤의 5분 역사연도 기록은...46개이다.
cf. 학습기억법과 대회기억법은 다르다. 학습기억법이 <실제 육상 경기의 전 종목>이라면 대회기억법은 <물구나무 서서 빨리 뛰기> 같은 그런 느낌? 현재 대회기억법(기억력스포츠)의 세계 챔피언인 알렉스 멀렌은 기억력스포츠를 실제 학습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최근에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니 학습기억법에서는 이제 겨우 초보를 면했다. 이미 오리쌤이 다 정리해 놓은 부분인데...영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과 중국 등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자. |
시작을 알리는 Start 멘트가 떨어지자 마자 5분 역사연도를 외워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첫 스타트부터 몇 초간 헤맸다. 이론적으로 전략은 세웠는데 실제 모의훈련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느낌.
그런데 (어이없게도...) 요하네스가 언제 첫 페이지를 넘기는 지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한 페이지에는 40개의 역사연도가 기재되어 있다. 첫 페이지 12번째 또는 14번째 연도를 외울 때 쯤일거다. 옆에서 첫 페이지를 넘기는 바람소리가 휘익~~~.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집중력이 급격히 흐트러지면서 결합 속도와 질이 더 떨어졌다. 속도를 끌어 올리고 결합의 질을 높여 보려 최대한 애썼으나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과는? 역시....역대 최저 점수인 29개. 개인 최고기록인 46개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심지어 30개 밑으로 떨어지다니 이건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이러려고 기억력스포츠를 시작했나하는 자괴감에 괴로워 하...하...하...한~~숨.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이제 10분 카드다. 6팩 이상 외워서 700점 이상 고득점할 수 있다(하지만...ㅎㅎ)
10분 카드 시작 전에 이번 한국 대회 조직운영장인 계원이 내게 와서 어깨를 주무른다. 외딴 섬에서 절대강자 요하네스와 힘겹게 겨루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나? ㅎㅎ 그때 마침 지나쳐 가던 경환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현재의 기억력스포츠계 레전드들을 배경으로, 왼쪽부터 한국에서 둘 뿐인 국제기억력마스터들인 계원과 오리쌤, 요하네스 말로우, 사이먼 라인하르트, 넬슨 델러스. 앞선 사진을 찍어주고 이동하려는 경환을 불러 세워 하네스, 사이먼, 넬슨을 배경으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기억력스포츠 역사에서는 기념할만한 한 컷이 될 것이다.
6. 10분 카드
10분 동안 카드를 최대한 많이 외운다. 30분 동안 recall sheet에 외운 카드의 value(숫자와 A,Q,J,K)를 차례대로 써 넣는다.
3년 전 필리핀 대회에서 10분 동안 4팩 반을 외웠다. 지금은 그때보다 카드 변환(정형화)의 완성도와 숙지도가 10~20% 정도는 더 높아졌다. 대회 전 3주 동안 숫자와 카드의 변환훈련에 훈련시간의 70%를 투자했기 때문이다. 대회 전전날 10분 카드를 외워 보니 5팩 반이 나왔다. 집중도가 높아지는 실제 시합에서는 6팩도 충분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런데...요하네스의 기세에 눌린 채 카드를 넘기려니 평소와 달리 매끄럽게 넘어가지가 않았다. 특히 맨 앞 외딴 테이블이라 대회 관계자 등 여러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는 통에 집중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카드에 집중해야 하는데 주위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였다. 맨 앞 줄에 앉는 탑 랭커들은 이러한 부담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4팩 반을 억지로 외웠으나 역시 2팩은 중간에 구멍이 몇 군데 나서...겨우 2팩 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아무리 결합훈련을 소홀히 했다고 해도 이렇게 형편없는 기록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3년 전 미숙한 실력에서 4팩 반을 외웠는데, 그래도 꽤 훈련이 된 지금 2팩 반이라니...
10분 카드에서 내 전략은 1) 기본: 먼저 5팩을 두 번 결합, 2) 추가: 100초 정도 남기고 6번째 팩 두 번 결합, 3) 보너스: 7번째 팩 최대한 결합하는 것이었다. 시작 하기 바로 전, 현재 컨디션과 상황이 정상이 아니니 1)의 기본 5팩을 4팩으로 줄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고 잠깐 고민했는데 자신감과 타성의 꼬임에 빠져서 그대로 진행했던 것이 실수였다. 4팩을 기본으로 했다면 결과는 4팩 반 정도로 나왔을 것이다.
한국 기억력스포츠계의 젊은 피인 재현, 신영과 함께. 추위에 시달린 흔적이 오리쌤의 얼굴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재현은 중국 유학파로 작년 중국 세계대회때 처음 만나서 올해 한국기억력스포츠 동호회 단톡방에 합류했다. 중국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신영은 군 현역 복무 중에 기억법을 학습에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를 만나 비로소 제대로 된 학습기억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회기억법(기억력스포츠)도 실력이 제법 늘어서 이번 한국 국제기억력대회에서는 내 뒤를 바짝 쫓아와 한국 2위에 올랐다.
7. 5분 무작위 단어
5분 동안 주어진 무작위 단어들(주로 '호랑이', '의자'처럼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명사들)을 최대한 많이 외운다. 한 페이지에는 세로로 다섯 줄('칼럼'이라 부른다)이 있고 한 칼럼에는 20개의 단어가 있다. 한 칼럼 20단어를 전부 기억해 내면 20포인트, 한 단어를 틀리면 10포인트, 두 단어 이상 틀리면 0포인트가 주어진다.
구체적 형상이 있는 형상명사라면 누구든지 5분 동안 100개 정도의 단어를 외울 수 있다. 그러나 국제 기억력 대회에서는 단어 하나를 틀리면 그 줄의 절반이, 두 개를 틀리면 0점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기억력스포츠 선수들은 100% 인출이 가능한 쪽으로 전략을 짠다. 결국 실제 기록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외울 수 있는 단어량의 거의 절반 수준에 그치게 된다. 한국 기록은 오리쌤이 기록한 60단어.
역시 이 종목에서도 역대 최악의 점수를 얻었다. 희한한 일은 한국랭킹 1위인 오리쌤 뿐만 아니라 한국 랭킹 2, 3, 4, 5위들이 오리쌤과 거의 비슷한 점수를 얻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이로써 대회 첫 날 7종목이 모두 끝났다. 첫 날 순위는 전체에서는 요하네스 말로우가 1위, 내셔널에서는 오리쌤이 1위를 지켰다. 추위에 너무 시달려서 몸살이 날 것만 같았다. 동호회원들과의 회식을 마다하고 서둘러 귀가하여 몸을 추슬렀다.
2월 19일 대회 둘째 날
택시를 타고 중앙대 후문에서 내려 체육관에 들어서니 테이블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더 긴 전기코드를 연결해서 제 자리에서도 히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흠...테이블이 제 자리로 돌아 왔으니 이제 내 점수도 제 자리로 돌아올 것 같구만...(하지만 돌아 오기는...강아지 뿔^^;;)
둘째 날은 15분 숫자, 스포큰 넘버스, 스피드 카드의 세 종목만 치르면 된다. 15분 숫자와 스포큰 넘버스는 1위와 미세한 차이로 한국 2위, 스피드 카드는 2위와 상당한 차이로 한국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어제 그렇게 부진하고서도 내셔널 1위에 올라 있으니 한국 신기록과 2위 기록의 3종목만 남은 지금, 제 1회 한국 오픈에서 초대 한국 챔피언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강아지 뿔 ㅎㅎ;;)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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