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할뇌(split brain) 연구의 권위자이셨던 고(故) 고영희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어떤 책(책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용만 복사해서 보았던지라 ㅎㅎ;;) 을 보고 한 동안 분할뇌 공부에 열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지만 지금도 여전히 좌뇌와 우뇌의 기능적 특성에 대한 공부는 매우 인기있는 공부인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책에는 기억술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한 외국 학자의 논문이 실려 있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오리쌤은 이 책의 복사본을 거의 20여년 전에 잃어 버렸습니다. 한글보카훈련소의 기억법 카테고리에 이 책에 있는 기억술의 역사에 대한 글을 올리고 싶었습니다만 모교까지 가서 그 책을 또 다시 복사해 오기가 번거로워 미루고 있었지요. 그러던 차에 인터넷에서 이 글(기억술의 역사 1 ~ 8)을 발견했습니다. ^^
그래서 애써서 타자를 쳐서 올린 분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 복사해서 여기에 싣습니다 ^^;;; 기억술의 역사에 대해 읽어보세요 ^^ 나중에 책 이름과 이 글을 쓴 학자에 대해 알아보고 추가하겠습니다.
기억술의 역사 1. - 기억술의 시초
고대 그리스 변론술의 강력한 도구였던 기억법
고대에는 기억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는 필기도구가 없으므로 오직 기억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필기도구가 생기게 되었지만 지식이나 지혜는 역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BC 6세기 후반의 고대 사회는 페르시아 제국이 약 2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야심에 찬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땅까지 넘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불을 붙인 것이 그리스의 식민도시 밀레투스다. 페르시아의 영향권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밀레투스는 아테네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걸 보고 다리우스 왕은 즉각 반란을 진압한 다음 배후를 조종한 그리스 정벌에 나섰다. 이것이 고대의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이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노선을 둘러싼 대립으로 날마다 격론이 벌어졌다. 아테네는 항복보다는 결국 전쟁을 택하였으며 물밀 듯 쳐들어오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마라톤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이날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고, 마라톤 경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전체에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 이해되었고 민족의 생존과 역사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누구나 공을 세우면 출세를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대군의 침입으로 아테네는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살라메스 해전의 승리로 10여 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난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도에 따라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때부터 웅변을 잘하는 변론술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변론에 필요한 기억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BC 5세기 경의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 섬의 시라쿠사시가 각지에 식민도시를 갖고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민주 정치의 실시로 이탈리아 본토에까지 진출하여 많은 도시를 지배하였다.
이에 따라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이 무수히 많아졌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에 되고 법정 변론이 부의 척도가 되면서 법정 변론을 가르치는 사람이 생겨났는데, 코락스나 테이시아스 같은 사람은 당시 유명한 웅변 스승이었다. 이것을 웅변의 시초로 보는 사람이 있다.
변론술의 학습에는 본보기가 되는 언변을 열심히 외우는 암기가 주류였으므로 여기서 기억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변론가들이 긴 연설을 할 때 마음먹은 것과 다르지 않게 열변을 토하려면 당연히 기억술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초기 기억술은 변론술의 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다. 기억술이란 기억한 내용을 필요한 때에 꺼내어 보다 신속하고 용이하게 이용하려는 기술을 말한다. 이 시대에 히피아스와 시모니데스가 가르쳤다고 하는 <그리스인의 변론술> 은 유명하다.
시모니데스는 기원전 500년경의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이다. <기억법은 웅변가의 본디부터 가진 교양을 나타내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고 말한 시모니데스는 기억법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시모니데스는 심상을 이용한 기억법을 고안하여 당시의 웅변가와 사상가들에게 보급하고 활용토록 하였다.
이 심상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과 회생>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당시의 웅변가들은 이같은 기억술을 신이 자기에게 내린 선물로 간주하여 소중하게 여길 정도였다. 시모니데스가 훈련된 기억법의 고안자라고 하면 시세로는 초기의 위대한 교사라고 하겠다. 시세로는 기억법의 도움을 <웅변가론>이라는 저서에서 "당시의 법률가나 웅변가들이 기억법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 자신도 어떻게 이 기억법을 활용하고 있는가를 밝혔었다.
변론술은 법정용, 의회용, 웅변용의 3분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유행되면서 이것을 가르치는 지혜의 스승이라는 소피스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존경이 나중에는 말만 앞세우는 궤변론자들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변론술이 진실이 아니라 진실인 것처럼 가장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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